
▲ 어둠 속에서 진실을 더듬어가는 시각장애인 전각 장인 '임영규'와, 40년 전 실종된 어머니의 백골 사체를 마주한 아들 '임동환'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얼굴>을 보고 왔습니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장르를 즐겨 보는 편이라 연상호 감독의 신작이라는 소식에 개봉 전부터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감정은 묵직하고도 복잡했습니다. 단순한 살인 사건 추리극을 넘어, 우리 사회의 곪아 터진 상처와 인간 내면의 뒤틀린 욕망을 들여다보게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얼굴>은 저예산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 미니멀한 연출이 오히려 40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 파묻힌 진실의 무게를 더욱 섬뜩하게 부각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배우들의 열연과 상징적인 장치들이 가득해 곱씹어 볼수록 의미가 깊어지는 영화입니다. 공백 제외 1500자 이상으로 제가 느낀 점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40년의 침묵을 깨고 드러난 비극의 줄거리와 인물들
<얼굴>의 줄거리는 전각 장인 임영규(권해효 분)와 그의 아들 임동환(박정민 분)에게 40년 전 실종된 아내이자 어머니 정영희(신현빈 분)의 백골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경찰의 연락이 오면서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말해왔지만, 타살의 가능성이 제기되자 동환은 PD 김수진(한지현 분)과 함께 어머니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동환은 어머니가 과거 청계천 의류공장에서 일했던 시절을 따라가며, 아버지 영규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과 어머니 정영희가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일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40년 전, 젊은 영규는 시각 장애를 극복하고 전각 장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영희는 남편과 아들을 위해 억척스럽게 일하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는 당대 사회의 어두운 면과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이로 인해 영희는 평화시장 사장 백주상(임성재 분) 등의 악인들에게 고통받았으며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동환이 과거를 추적할수록, '가족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라는 믿음은 산산조각 나고, 충격적인 진실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밝혀지는 진범의 정체와 그 동기는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선사하며, 단순히 과거의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복잡하고 뒤틀린 심리를 깊이 있게 조명합니다.
▲ 권해효와 박정민, 신현빈의 소름 돋는 열연: '얼굴'을 완성하다
이 영화의 완성도를 끌어올린 것은 단연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입니다. 특히, 주연 배우인 박정민의 열연은 극찬할 만합니다. 그는 40년 전 어머니의 진실을 추적하는 아들 임동환 역을 맡아 혼란과 분노, 슬픔 등 복합적인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해냅니다. 또한, 과거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기록물을 통해 젊은 시절의 백주상까지 1인 2역처럼 소화해낸 그의 연기는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박정민 배우가 보여준 '진실을 알고 난 후의 공허함'은 관객들에게도 그대로 전이됩니다. 권해효 배우는 시각장애인 전각 장인 임영규를 연기했는데, '살아있는 기적'으로 불리는 장인의 모습 이면에 숨겨진 어둡고 뒤틀린 내면을 깊이 있게 표현하며 극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립니다. 그의 눈빛, 몸짓,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 속에 감춰진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신현빈 배우는 임동환의 어머니 정영희 역을 맡아 과거 회상 장면 등을 통해 강인하면서도 비극적인 인물의 삶을 그려냈습니다. 그녀가 마주해야 했던 사회적 폭력과 멸시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주조연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의 묵직한 메시지는 전달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했습니다.
▲ '얼굴'과 '전각', 그리고 '기록'의 상징적 의미를 되새기다
영화의 제목인 '얼굴'은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입니다. 물리적인 '얼굴'은 물론, 인물의 '진짜 모습' 혹은 '이면'을 상징합니다. 시각 장애로 인해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임영규는, 외모에 대한 극심한 콤플렉스와 주변의 악담으로 인해 아내를 '못생긴 사람', '멸시받는 존재'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는 곧 그의 뒤틀린 내면이 만든 아내의 '가짜 얼굴'을 상징합니다. 40년 후, 아들 동환은 어머니의 백골 사체를 통해 어머니의 '얼굴'을 처음 마주하게 되고,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어머니의 '진짜 삶'이라는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합니다. 영규가 평생을 바친 '전각(도장 새김)' 또한 중요한 상징입니다. 도장은 한 사람의 이름과 정체성을 새기는 행위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전각 장인 영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장을 만든다는 아이러니는, 겉으로 보이는 명성과 실제 내면의 추악함 사이의 간극을 보여줍니다. 도장이 찍히는 순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 확정되는 순간인데, 영규가 새긴 도장은 과연 누구의 '얼굴'을 담고 있었을까요? 마지막으로, '기록'의 상징성입니다. 동환은 PD와 함께 어머니의 죽음을 추적하며 인터뷰를 진행하고, 어머니의 삶이 담긴 사진과 필름을 마주합니다. 특히 백주상의 카메라에 담긴 어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은, 폭력과 성적 대상화의 기록인 동시에 동환이 어머니의 젊은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비극적 아이러니를 더합니다. 영화는 이 상징적인 장치들을 통해 외면받아왔던 진실, 감추고 싶었던 추악한 민낯, 그리고 왜곡된 기억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관객들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얼굴>은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폭력, 외모지상주의, 그리고 진실을 외면하려는 인간의 나약함을 냉철하게 보여주는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총평]
<얼굴>은 단순한 흥행작을 넘어, 우리 시대에 던져야 할 질문을 담고 있는 문제작입니다. 이 긴 글을 읽으신 여러분도 기회가 된다면 꼭 이 영화를 보고, 40년의 세월이 묻어버린 '얼굴'들의 진실을 마주하시길 바랍니다.